모든 것이 완벽했다. 눈이 시리도록 쏟아지는 가을 햇살 아래, 25년 만에 내 집 마련에 성공한 만수(이병헌 분) 곁에는 아름다운 아내 미리(손예진 분)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과 딸, 그리고 사랑스러운 강아지 두 마리가 함께 있다.
문자 그대로 부러울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을 다 이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 만수는 25년간 모든 것을 바친 회사로부터 “어쩔 수가 없다”라며 해고 통보를 받는다. 3개월 내 재취업을 하겠다고 아내와 약속했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나는 가장이다. 내 가족 입에 밥을 먹여 주려면 나는 무슨 짓이든 한다.”
월남전에서 ‘공격하지 않으면 공격당한다’는 것을 목숨으로 깨달은 아버지처럼, 나 역시 전쟁을 벌여야 한다. 예비 경쟁자를 내 손으로 직접 처리해 내가 설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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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리뷰] 품격 있고 세련된 아수라장…박찬욱의 도전은]()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액스'를 오늘날 우리 시대상을 반영해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다. 영화는 단순히 웃음을 유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웃음 뒤 숨겨진 씁쓸함과 냉소, 날카로운 사회 비판을 담고 있는 전형적인 블랙코미디 장르로서 완벽하게 기능한다.
한 발짝 떨어져 보면 한바탕 대소동극으로 쓴웃음이 터져 나오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이보다 더한 비극과 슬픔이 없다.
만수의 재취업 분투기 내내 기막힌 아수라장과 정신없는 난장판이 벌어지지만, 박 감독은 자신이 으레 그래 왔듯 이마저도 우아하고 세련되게 표현했다. 해고와 실업의 위기에서 촉발된 가족 간의 갈등, 거세된 남성성으로 위태롭게 부유하는 가장들의 내밀한 모습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이번에도 자신의 독특한 유머 감각을 절대 잃지 않고 뚝심 좋게 밀어붙인다.
작품 속 만수의 대사를 빌리자면, 창의적인 발상과 치밀하고 대담한 연출인 셈이다. 덕분에 이번 작품 역시 아름답지만 기괴하고, 폭력적이지만 우아하며, 어둡지만 유머를 잃지 않는 매혹적인 부조화의 영화가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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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리뷰] 품격 있고 세련된 아수라장…박찬욱의 도전은]()
영화 '어쩔수가없다' 포스터 ⓒCJ ENM
특히 이번 영화의 가장 큰 재미 요소는 이러한 아이러니의 미학이다. 해고당한 날은 햇빛이 쏟아지고 첫 출근 날은 비가 오는 것처럼, 지키기 위해서는 죽여야만 하는 모순의 역설이 작품 전체를 지배한다.
무엇보다 만수가 자신의 경쟁자라고 여겼던 구범모(이성민 분), 고시조(차승원 분), 최선출(박희순 분)과 실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똑 닮은 인물이라는 점은 이러한 아이러니를 배가한다. 술에 의존하거나, 딸에 대한 사랑이 깊거나, 아내밖에 모르는 이들은 결국 만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 다름없다.
때문에 만수가 보장되지 않은 미래를 위해 이들을 처리하는 과정이 실은 자신을 갉아먹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역설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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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리뷰] 품격 있고 세련된 아수라장…박찬욱의 도전은]()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한층 더 흥미로운 것은 이번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굉장한 깊이감을 보이며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낸다는 점이다. 덕분에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캐릭터 역시 많아졌고, 작품으로의 몰입 역시 수월해졌다. 누군가는 만수에게 감정을 기댈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미리에게 마음이 갈 것이다. 범모, 시조, 선출, 아라(염혜란 분) 역시 다르지 않다.
이처럼 작품이 지닌 미덕과 여러 강점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호불호의 요소 또한 명확하다.
특히 박찬욱 감독의 전작 ‘헤어질 결심’에 열광했던 이들이라면 다소 직설적이고 직선적인 이번 작품이 되레 흥미롭지 않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이 그간 극단적인 복수나 금기된 욕망 등을 주제로 삼았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사회 부조리와 인간의 어리석음 같은 보편적인 소재를 다뤘다는 점 역시 신선함보다 익숙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선형적이고 명쾌한 서사 구조보다 복잡한 구조를 선호하는 관객이라면 일종의 ‘지적 유희’의 느낌이 줄어들어 ‘어쩔수가없다’가 상대적으로 쉬운 영화로 느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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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리뷰] 품격 있고 세련된 아수라장…박찬욱의 도전은]()
영화 '어쩔수가없다' 스틸컷 ⓒCJ ENM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가 자신의 시그니처 스타일인 특유의 아름다운 미장센과 아이러니라는 주제 의식을 유지하면서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과잉과 파격’에서 ‘절제와 보편성’으로 변주했기 때문이다.
이는 분명 박찬욱의 또 다른 진화이자, 박찬욱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더 넓은 관객과 소통하는 일종의 거대한 도전처럼 해석된다.
영화 ‘어쩔수가없다’. 박찬욱 감독 연출. 배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출연. 15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39분. 2025년 9월 24일 극장 개봉.
YTN star 김성현 (jamkim@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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