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짜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어."
할리우드의 명배우 톰 크루즈와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의 신작 '디거'를 관통하는 이 대사는, 앞으로 펼쳐질 기묘하면서도 매혹적인 동시에 파괴적인 블랙 코미디의 포문을 여는 완벽한 선언문이다.
영화 '디거'는 최소한의 손실과 최대한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석유 재벌 ‘디거 록웰’ 소유의 그린란드 빙하 시추 시설에서 발생한 작은 균열이 전 세계를 뒤흔들 역대급 대재앙이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기후 위기와 자본주의의 민낯을 향해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처럼 주저 없이 폭주하던 영화는, 어느 순간 이야기의 구조를 겹겹이 뒤집으며 관객을 기막힌 위선과 유희의 무대 한가운데로 던져버린다.
이 거대한 촌극의 중심에는 톰 크루즈의 위대한 원맨쇼가 자리하고 있다. 그간 '미션 임파서블', '탑건' 시리즈를 통해 세기의 액션 스타이자 세계를 구하는 영웅의 페르소나로 활약해 온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과거 스탠리 큐브릭, 폴 토머스 앤더슨, 마틴 스코세이지 등과 빚어냈던 압도적이고 경이로운 연기를 다시금 폭발시킨다.
그가 완벽하게 입은 석유 재벌 '디거 록웰'은 독선적이고 오만하며, 자신이 늘 옳다고 믿으면서 권력을 쥐고 흔드는 자본의 화신이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친 연기력으로 스크린을 장악하며 자신이 왜 현존하는 최고의 배우인지 여실히 증명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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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거' 포스터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작품의 서사는 록웰 소유의 그린란드 빙하 시추 시설에서 발생한 1.5미터(5피트)의 작은 균열에서 출발한다. 단 2주 만에 9미터(30피트)로 벌어진 균열에 빙붕 붕괴의 경고가 쏟아지지만, 최소 손실과 최대 이익만을 좇는 록웰은 피해가 막심하다며 시추 중단을 거부한다.
결국 워싱턴 DC 5배 크기의 빙붕 '주디(JUDY)'가 떨어져 나와 유럽을 덮치는 파국이 도래한다. 수백만의 사상자와 쓰나미 피해가 확정된 상황에서도 그는 이를 "순식간에 날벼락"이라 부르며 책임을 회피한다.
이처럼 초유의 재난을 대하는 밀실 회의 장면은 이 영화의 첫 번째 명장면이다. 대통령과 록웰, 각 부처의 장관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는 타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도 실없이 농담과 같은 대화가 오간다. 미사일을 쏘자느니, AI를 활용한 방화벽을 가동해 사건을 은폐하자느니 사안의 중대성과 비교해 너무나 가벼운 이야기가 난무한다.
이내 대뜸 거대한 대자연 앞에서 "미국이 가장 위대한 나라임을 칭송하고, 하나님의 국가임을 인정해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가 울려 퍼진다. 권력, 인종, 성별, 종교, 기후 위기, 그리고 미국의 패권주의까지 끝없이 타격하는 이 풍자는 감독이 철저히 그 누구의 편도 아님을 명쾌하고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디거'의 진짜 야심은 이 지점부터 시작된다. 파멸을 향해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직진하던 이 영화가, 사실은 한 연극의 리허설이었다는 기막힌 사실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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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거' 스틸컷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악당 그 자체였던 디거 록웰이 실은 스트레스로 3개월간 원형탈모에 시달릴 만큼 예민하고 작품에 진심인 배우 '커티스'였다는 것이 밝혀진다. 완벽주의자 커티스는 감독이 원하는 연출 방향이 모두 가짜 같다며 몰입하지 못해 겉돌고, 첫 공연을 보러 올 딸 '호프'가 비행기를 타지 않았다는 소식에 전전긍긍하지만 리허설 만큼은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영리한 액자식 구조는 관객을 묘한 위치에 세워둔다. 영화 속 인물들이 무대 위에서 펼치는 연극은, 역설적으로 스크린 밖에서 이를 지켜보는 우리가 처한 진짜 현실인 기후 위기와 이기심을 가장 날카롭게 고발한다. 마치 거울이 마주 보며 끝없이 반사되듯 우리네 자화상을 반복적으로 비추는 것이다.
연극은 계속된다. 결국 거대한 빙붕으로 인해 재앙이 닥치고 록웰은 유럽 연합의 수많은 의사결정권자 앞에 선다. 여기서 펼치는 그의 연설은 이 영화의 두 번째 명장면이다. 파국이 도래할 것을 알면서도 왜 시추를 멈추지 않는가.
커티스의 입을 빌려, 록웰의 목소리를 빌려 감독은 관객의 폐부를 찌른다.
모두가 고결한 척해도 결국 우리는 자동차를 타고, 총알배송을 원하며, 폰을 충전해 틱톡과 유튜브를 보고 AI를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록웰이 강조하듯 "지속 불가능한 삶의 안락함"을 누구도 포기할 수 없기에 이 사단이 났다는 뼈아픈 통찰이다.
"석유는 신이 주신 선물"이며 "사자가 임팔라를 잡아먹어도 자연은 기뻐한다"는 궤변에 처음엔 야유하던 유럽의 권력자들이 결국 록웰의 연설에 환호하고 마는 장면은, 연극과 영화 그리고 현실의 경계를 지우며 실제 스크린 밖 우리 마음속 모순된 욕망까지 예리하게 건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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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디거' 스틸컷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이토록 재기발랄하고 영리한 영화는 결말을 향하며 다시금 또 한 번의 반전을 꽂아 넣는다. 이들이 핏대 세워 연습하던 연극은, 사실 실제 빙붕이 유럽을 덮쳤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한 이 연극 역시 이미 25년간 사랑받아 온 컬트 명작 작품이었던 것이다.
커티스가 3천 시간이 넘도록 실제 디거의 영상을 파고들며 지난 역사를 공부했기에, 감독의 얄팍한 디테일이 그토록 견디기 힘들었던 셈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영화의 지독한 아이러니, 마지막 반전이 관객을 맞이한다. 이 연극을 구상하고 막대한 자금을 대며 커티스를 캐스팅한 제작자가 다름 아닌 실제 디거의 조카 '케니'였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재난과 전쟁의 원흉인 가문이, 자신들의 끔찍한 과오를 재현해 대중에게 쾌감을 안기는 쇼에 돈을 쏟아붓고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얼핏 자본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포장될지 몰라도, 실은 여전히 에너지 권력을 움켜쥔 자들의 오만한 위선이자 기괴한 유희에 불과하다.
영화 속 연극이 끝난 뒤 실제 참혹한 폐허가 된 현실을 비추며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은 누군가에게는 어지러운 피로감을, 누군가에게는 불가항력적인 실제 재난에 대한 조롱으로 다가갈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거'는 과감하고 기묘하며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블랙 코미디의 정수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 묵직한 잔상과 선명한 이미지는 톰 크루즈가 왜 현존하는 최고의 배우인지, 그리고 이냐리투 감독이 왜 그간 칸과 아카데미 그리고 골든 글로브를 휩쓸었는지를 완벽하고도 명쾌하게 증명한다.
영화 '디거'. 알레한드로 G. 이냐리투 감독 연출. 배우 톰 크루즈, 산드라 휠러, 존 굿맨, 제시 플레먼스 출연. 러닝타임 129분. 15세 이상 관람가. 2026년 10월 3일 극장 개봉.
YTN star 김성현 (jamkim@yt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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